글은 인간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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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신 문학 평론가 문학을 평(評)한다는 것은 작가를 더욱 사랑 한다는 말과 같다.
작가가 발표한 글을 여러번 정독하며 한 사람의 세계로 깊고 섬세하게 들어 갈수 있어서 사람들을 깊고도 투명하게 만나 볼수 있다.
문학이나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다. 사실 진실 속에 상봉코 싶고 깊이있게 느끼고 싶으며 새롭게 인식 하고픈 마음에서 책을 찾고 분석하고 고뇌한다.
평자는 그 작품이 사람을 잘 그렸는지를 알기위해 부단한 노력을 The는다. 글감이 작가에게서 무르익어 생명의 향내를 풍기거나 딱딱한 열매 속에서 구수한 맛을 느끼면 비로소 숨겨서 익힌 생명의 글의 사이에서 읽으며 박수를 보낸다.
대체로 타고난 소질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소질을 믿고 자만하여 창작한다면 발표하는 작품마다 튼실할 수는 없다. 누구든지 자신의 글이 언제든지 좋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 이라면 평론에 올려져 자유로워 져야 진정한 작품으로써의 대접을 받는다고 할 것이다.
글에 대한 욕망이랄지 열정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글을 창작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철학. 종교. 역사. 여성학 . 심리학과 미학에 이르기 까지 접근해서 인간을 알고 이해하는 폭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적인 문제를 전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흥미를 덧씌우는 기능을 익혀야 공감의 폭을 넓힐 수가 있다.
창작한 작가 스스로만 재미가 있어서도 곤란하고 내용은 튼실한데 읽는 재미가 없는 것 또한 난감 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 검증도 없이 일부의 개인적 감정에 서정내지 정서의 옷을 입혀 문학이라 해 놓으면 문제 중의 문제다.
그것은 자신이 읽기위한 작품이지 독자를 위해 창작한 것은 아니기에 평론가의 입에서 왈가왈부 하게 된다.
글도 인간의 성장 단계와 같다. 일정의 습작기 즉, 발달 단계를 거치면 걸어가는데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걸음마도 거치지 않고 걷게 되면 바른 걸음 걸이가 될 수 없다.
자가가 어떤 목적을 두고 어떤 자세로 창작을 하던 평자의 눈에 애정 없이는 바른 평론을 할 수가 없는데 소위 지역 의 문단에서는 함량미달 이 흔하게 횡행하니 우울할 때가 간혹 있다.
심도있는 작품을 앞에 놓고 가늘게 느껴지는 숨소리와 뜨거운 맥박을 느끼며 가슴 뛰는 박동을 들어야 하며 영혼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우연히 흘러나온 작가의 내면적인 통곡을 들어야한다.
어떤 글을 보면 선후가 뒤바뀐 작품도 있고 자세히 읽어보면 행간마다 빛나는 모습을 상봉키도 한다.
평론가의 문학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그만큼 진지하고 정중하며 고뇌의 흔적들이다.
인간적인 작품 평을 위해서는 수많은 인간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다독(多讀)을 하게 되고 끊임없이 본질적 물음에 답해야한다. 수많은 성격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하는 막중함 속에서 더러는 가는길이 망설여 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단상이다.
열정으로 접근하여 내어놓은 비평이 세상사람 앞에 놓였을 때 평자는 비로소 두려움 에서 해방되어 인간집단 으로 회귀하게 된다.
전남인터넷뉴스 칼럼리스트
소설가 이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