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 이상설 선생기념관 건립 위한 기금모금 작품전

오는 15일부터 28일까지 2주간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기사입력 2018.08.08 11:19 조회수 159
댓글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사단법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와 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정부수립 제99주년과 광복 제73주년을 맞는 2018년 8월 15일부터 28일까지 2주간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서전서숙’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작품전을 개최한다. 

 

[포스터]%20이상설선생기념관%20건립기금%20작품전_jpeg.jpg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은 민족 독립 운동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 설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정사, 최초의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인 한흥동 건설, 권업회 조직, 독립군사학교 대전학교를 세웠으며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되어 구국의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7년 3월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최근 발견된 일본의 비밀문서에서 일제는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스승이자 배후로 보재 이상설 선생을 지목하고있다.)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은 민족 독립을 위한 처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상설 선생을 기억하고 근대 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생의 학문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맞닿아 있는 선생의 철학을 전파하기 위한 제대로 된 시설이 없고 

 

이상설 선생과 함께 연해주를 중심지역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한흥동과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에 참여한 많은 우국지사와 함께 싸워온 우리 민족과 동포를 기억하기 위한 시설이 없어 기념사업회와 충청북도, 진천군이 중심이 되어 2013년 이상설 선생 숭모사업과 함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기념관 건립은 이상설 선생의 생가와 사당(숭렬사, 충청북도 기념물77호)이 위치한 충북 진천군 생가 인근에 건립하기 위해 부지 마련과 기념관 설계를 완료하고 순국100주기(2017년)에 맞추어 공사를 진행, 기념관을 개관하고자 하였으나 건립에 필요한 기금 중 일부를 기념사업회가 부담을 해야 한다는 문제에 가로막혀 착공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서전서숙’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작품전은 정부 수립 제99주년과 광복 73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에도 불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부담 확보의 문제를 일부나마 해결하고자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전을 준비한 기념사업회 이석형 회장은 “이번 작품전에는 되찾은 조국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전통 한국화를 중심으로 준비했다.”고 말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펼치신 선생을 기억하고 함께 싸운 당시 우리 민족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을 더는 미룰 수 없기에 여러분의 도움으로 전환점을 찾고자 한다”고 밝히며 작품전에 대한 성원과 응원을 부탁하였다.  

 

‘서전서숙’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작품전의 오프닝 행사는 2018년 8월 16일(목)오후 2시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사단법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관계자를 비롯한 뜻 있는 국민들과 충청북도, 진천군 등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편, 사단법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와 충청북도, 진천군은 그동안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며 후원 모금 활동과 우리 학생들과 중국 동포들이 함께하는 이상설 수학교실, 시낭송 대회, ‘거인의 꿈, 이상설’ 연극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며 기념관 건립과 선생의 철학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재 이상설 선생 약력]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1917) 민족 독립운동가시며, 우리나라 근대수학의 아버지로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협동회」을 조직,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서 오셨고,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정사로 파견되어 일제의 대한 침탈과 식민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지지, 호소를 위하여 노력하셨으며, 미·불·독·러시아 등을 순방하시면서 구국 외교활동을 했다. 

 

1909년 연해주 봉밀산에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 「韓興洞」을 건설하셨으며,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최초의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도크에서 권업회 「勸業會」를 조직하여 「한민학교」를 확장하셨으며, 1913년 중국 나자구 「羅子溝」에 독립군사학교인 대전학교 「大甸學校」를 세우며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펼치셨고, 1914년 이동휘·이동녕 선생등과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됐다.

 

1915년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선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 본부장을 맡았으나 1917. 3.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향년 48세로 서거하셨고, 유언에 따라 우스리스크 수분하 강가에 화장되고, 동지들을 위하여 문고(文藁)도 모두 불태워졌다.

[김형규 기자 mskim55515@naver.com]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저작권자ⓒ인터넷핫뉴스 & schi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